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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허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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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짐 허튼은 1934년 뉴욕주 빙엄턴에서 태어난 미국의 배우이다. 1958년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로 데뷔하여, MGM과 계약 후 《보이즈는 어디에》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이후 《적응의 시기》, 《메이저 던디》 등 영화와 TV 드라마를 오가며 활동했으며, 1975년부터 1976년까지 TV 시리즈 《엘러리 퀸》에서 주인공 엘러리 퀸 역을 맡아 대표작을 남겼다. 1979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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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허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짐 허튼 엘러리 퀸 1976
1976년 엘러리 퀸에서 허튼
본명데이나 스콧 제임스 허튼
출생1934년 5월 31일
출생지미국 뉴욕주 빙햄턴
사망1979년 6월 2일 (45세)
사망지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안장 장소화장: 유골의 일부는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파크 묘지에 안장됨
학력시러큐스 대학교
나이아가라 대학교
활동 기간1956년 – 1979년
배우자매릴린 풀 (1958년 결혼, 1963년 이혼)
린니 M. 솔로몬 (1970년 결혼, 1973년 이혼)
자녀3명, 티모시 허튼 포함

2. 생애

짐 허튼은 1934년 5월 31일 뉴욕주 빙햄턴에서 《빙엄턴 프레스》의 편집자이자 편집장이었던 헬렌과 토마스 R. 허튼의 아들로 태어났다.[1] 부모는 허튼이 유아기일 때 이혼했고, 그는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 허튼은 스포츠와 친구들과의 게임을 즐겼다.

허튼은 행동 문제로 5개의 고등학교와 기숙 학교에서 퇴학당했지만, 학점과 시험 점수는 훌륭했다. 1952년 학교 신문 스포츠 칼럼을 시작한 후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저널리즘 장학금을 받았으나,[2] 술에 취해 도서관 근처 튤립밭에 불도저를 몰고 들어가 퇴학당했다.[20] 이후 나이아가라 대학교에 입학하여 배우 경력을 시작했고,[3] 코네티컷과 라호야에서 여름 연극에 출연, 주 웅변 대회에서 우승했다.[7]

1955년 뉴욕에서 "비트족"이 되었으나,[2] 연기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1956년부터 특수 부대 복무를 위해 베를린으로 가기 전까지 40편이 넘는 육군 훈련 영화에 출연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버려진 극장을 개조, 아메리칸 커뮤니티 극장을 설립하고 베를린에 최초의 영어 극장을 세웠으며,[1] 훗날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2년이었다"고 회상했다.[20]

육군 복무 중 독일에서 케인호의 반란 퀴그 대위 역으로 출연, 더글러스 서크 감독의 눈에 띄어 사랑할 때와 죽을 때(1958)에 작은 배역으로 출연 제의를 받았다.[5][4] 허튼은 이 영화에서 자살하는 신경질적인 독일 병사 역으로 데뷔했고, 유니버설은 이 장면을 보고 장기 계약을 제안했다.[2] 허튼은 독일에 머무는 동안 지옥까지 10초(1959)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다.

2. 1. 초기 생애

짐 허튼은 1934년 5월 31일 뉴욕주 빙햄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빙엄턴 프레스》의 편집자이자 편집장이었던 헬렌과 토마스 R. 허튼이었다.[1] 허튼은 유아기에 부모가 이혼했고,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는 스포츠를 즐겼고 친구들과 게임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허튼은 행동 문제로 인해 5개의 고등학교와 기숙 학교에서 퇴학당했지만, 학점과 시험 점수는 훌륭했다. 학교 신문의 스포츠 칼럼을 시작한 후, 1952년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저널리즘 장학금을 받았다.[2] 그는 술에 취해 도서관 근처 튤립밭에 불도저를 몰고 들어가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퇴학당했다.[20]

그 후 허튼은 나이아가라 대학교에 입학하여 배우 경력을 시작했다.[3] 그는 코네티컷과 라호야에서 여름 연극에 출연했으며, 주 웅변 대회를 우승했다.[7]

1955년, 그는 뉴욕으로 돌아와 스스로 "비트족"이 되었다고 말했다.[2] 그는 연기 일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하며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2. 2. 군 복무

허튼은 1956년부터 미국 육군에 복무했으며, 특수 부대 복무를 위해 베를린으로 가기 전까지 40편이 넘는 육군 훈련 영화에 출연했다.[1] 허튼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버려진 극장을 개조하여 아메리칸 커뮤니티 극장을 설립하고, 베를린에 최초의 영어 극장을 세웠다.[1] 그는 훗날 이때를 회상하며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2년이었다"고 말했다.[20]

육군 복무 중, 허튼은 독일에서 케인호의 반란 공연에서 퀴그 대위 역으로 출연했는데, 이때 미국 영화 감독 더글러스 서크의 눈에 띄었다. 서크는 허튼에게 사랑할 때와 죽을 때 (1958)의 작은 배역을 제안하며, 뉘른베르크 부대 합류를 위한 휴가를 받을 수 있다면 출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5][4] 허튼은 이 영화에서 자살하는 신경질적인 독일 병사 역으로 데뷔했다. 유니버설은 이 장면을 보고 장기 계약을 제안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2] 허튼은 독일에 머무는 동안 지옥까지 10초 (1959)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다.

3. 배우 경력

짐 허튼은 제대 후 할리우드에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TV 드라마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1959년 로드 테일러와 함께 출연한 환상특급 에피소드 "그리고 하늘이 열렸을 때"가 그의 첫 번째 주목할 만한 스크린 출연이었다.[1] 아빠는 멋쟁이, 테이트 등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1] 같은 해 미리엄 홉킨스와 함께 라호야 플레이하우스에서 연극 고향으로, 천사여에 출연했다.[1]

메트로-골드윈-마이어(MGM) 오디션을 통해 장기 계약을 맺은 허튼은[2] ''지하인간들''(1960)에 출연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7] 하지만, 십대 코미디 영화 ''보이즈는 어디에''(1960)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8] 키가 크고 껑충한 체격과 멍한 표정 때문에 제임스 스튜어트의 후계자로 여겨졌으며, 영화에서 폴라 프렌티스와 낭만적인 파트너로 등장했다. MGM은 그들을 윌리엄 파월과 마이르나 로이처럼 정기적인 팀으로 만들기로 했다.[9]

허튼은 프렌티스와 함께 ''허니문 머신''(1961), ''파라다이스의 바람둥이''(1961), ''수평 대위''(1962)에 출연했다. 1962년, 프렌티스와 그는 헤일리 밀스, 낸시 콴 등과 함께 "미래의 스타" 10인에 선정되었다.[13] MGM은 허튼을 제인 폰다와 함께 ''적응의 시기''(1962)에 출연시켰고,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그는 1962년 라호야 플레이하우스에서 ''나에게 살인을 써줘''에 출연했다.[15] 이후 코니 프랜시스와 함께 ''사랑을 찾아서''(1964)에서 주연을 맡았으나 성공하지 못했다.[16]

코미디 연기에 싫증이 난 허튼은 MGM과 계약을 해지하고,[18] 유니버설과 1년 계약을 맺었다. 샘 페킨파 감독의 서부극 ''메이저 던디''에 출연했고,[18] 이어서 버트 랭커스터와 함께 존 스터지스 감독의 ''할렐루야 트레일''(1965)에 출연했다.[19]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실패했지만, ''던디''는 최근 재평가받고 있다.

허튼은 ''늦어도 너무 늦지는 않아''(1965)에서 젊은 남성 역을 맡았다.[20] 캐리 그랜트와 함께 코미디 영화 ''걸어서, 뛰지마''(1966)에 출연했으며,[23] 이 영화의 성공으로 ''누가 민트를 관리해?''(1967)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널리 상영되지는 않았다. 1967년, 존 웨인 주연의 ''그린 베레''에 출연하여 특수 부대 하사 역을 맡았다.[27] 1968년에는 웨인과 함께 ''헬파이터''에 출연했다.[28]

1970년대 초, 허튼은 텔레비전에서 주로 활동하며, ''정신과 의사'', ''러브 아메리칸 스타일'' 등에 출연했다. TV 영화 ''치명적인 사냥''(1971)과 ''내키지 않는 656 언덕의 영웅들''(1971)에도 출연했다.[29] TV 영화 ''그들은 살인이라고 부른다''(1971)에서 더그 셀비 역을 연기했고,[30] ''어둠을 두려워하지 마세요''(1973), ''언더그라운드 맨''(1974), ''마커스 웰비, M.D.'' 등에도 출연했다.[33] 마지막 극장 영화는 ''사이킥 킬러''(1975)였다.[34]

1975년, 허튼은 TV 영화와 TV 시리즈 《엘러리 퀸》에서 엘러리 퀸 역을 맡았다. 데이비드 웨인이 그의 아버지 역을 맡았으며, 1946~1947년 뉴욕 시를 배경으로 총 23개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마지막 출연작으로는 《플라잉 하이》, 《$weepstake$》, 《원더풀 월드 오브 디즈니》 ("스카이 트랩") 등이 있다.[36] 마지막 텔레비전 역할은 1979년 8월에 방영된 미판매 파일럿 《버터플라이》였다.

3. 1. 초기 경력 (1958-1960)

짐 허튼은 제대 후 할리우드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TV 드라마에서 경력을 쌓았는데, 1959년 로드 테일러와 함께 출연한 환상특급 에피소드 "그리고 하늘이 열렸을 때"가 그의 첫 번째 주목할 만한 스크린 출연이었다.[1] 아빠는 멋쟁이, 테이트 등의 TV 프로그램에도 게스트로 출연했다.[1]

1959년에는 미리엄 홉킨스와 함께 라호야 플레이하우스에서 공연한 고향으로, 천사여에 출연하기도 했다.[1]

3. 2. MGM과의 계약 (1960-1964)

허튼은 메트로-골드윈-마이어(MGM)의 임원인 알 트레스코니와 벤 토 앞에서 오디션을 보았고, 이들은 허튼에게 장기 계약을 제안했다.[2] MGM은 그를 "비트족"에 관한 드라마인 ''지하인간들''(1960)에 출연시켰으나 큰 흥행 실패를 거두었다.[7] 하지만, 허튼은 같은 스튜디오의 십대 코미디 영화 ''보이즈는 어디에''(1960)에 출연하였고,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8]

키가 크고 껑충한 체격과 멍한 표정 때문에 허튼은 제임스 스튜어트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허튼은 영화에서 폴라 프렌티스와 낭만적인 파트너로 등장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당시 MGM과 계약한 배우들 중 가장 키가 컸기 때문이다(허튼은 195cm, 프렌티스는 178cm). 대중의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MGM은 그들을 윌리엄 파월과 마이르나 로이처럼 정기적인 팀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9]

허튼은 프렌티스와 함께 스티브 맥퀸을 지원하는 ''허니문 머신''(1961)에 출연하여 히트를 쳤다. 이후 그들은 밥 호프라나 터너가 출연한 ''파라다이스의 바람둥이''(1961)를 제작했지만 손실을 보았다. 허튼과 프렌티스는 ''수평 대위''(1962)에서 톱 빌링을 받았지만, 흥행에 실패했다.[9]

1962년, 프렌티스와 그는 헤일리 밀스, 낸시 콴, 호르스트 부흐홀츠, 캐롤 린리, 돌로레스 하트, 줄리엣 프로즈, 코니 스티븐스, 워렌 비티와 함께 "미래의 스타" 10인에 선정되었다.[13]

MGM은 허튼을 제인 폰다와 함께 조지 로이 힐이 감독한 코미디 드라마 ''적응의 시기''(1962)에 출연시켰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그는 1962년 라호야 플레이하우스에서 ''나에게 살인을 써줘''에 출연하여 무대 연기를 했다.[15] 그는 코니 프랜시스와 함께 ''사랑을 찾아서''(1964)에서 주연을 맡았으나 성공하지 못했다.[16]

3. 3. MGM 이후 (1964-1975)

코미디 연기에 싫증이 난 허튼은 MGM의 시나리오를 15개월 동안 거절했고, 결국 스튜디오는 그와의 계약을 해지했다.[18] 그는 유니버설과 1년 계약을 맺었고, 샘 페킨파가 감독하고 찰턴 헤스턴리처드 해리스 다음으로 허튼이 셋째 주연을 맡아 무능한 장교를 연기한 컬럼비아에서 서부극 ''메이저 던디''를 제작하자는 제안을 받았다.[18] 촬영은 멕시코에서 진행되었다. 그는 이어서 버트 랭커스터와 함께 존 스터지스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위해 연출한 또 다른 대작 서부극 ''할렐루야 트레일''(1965)에 출연했다.[19]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실패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던디''의 평가는 높아졌다.

허튼은 폴 포드코니 스티븐스와 함께 워너 브라더스에서 제작된 ''늦어도 너무 늦지는 않아''(1965)에서 젊은 남성 역을 맡았다.[20]

"''메이저 던디''와 ''할렐루야 트레일''에서의 역할은 좋았지만, 주변적인 역할이었어요." 그는 이 무렵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조금 뻔뻔하게 말하자면, 제 나이대에서 코미디 연기를 잘 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잭 레몬이 최고이지만, 젊은 배우 중 누구를 떠올릴 수 있겠어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흉내만 낼 뿐이지, 자신들의 농담에 웃지도 못하죠."[20]

허튼은 셸리 버먼이 스크린 젬스를 위해 쓰고 연출한 여행 세일즈맨에 관한 시트콤 ''바니''의 파일럿을 제작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21] 그는 ''천사와 함께한 문제''에 카메오로 출연했고,[22] 컬럼비아에서 사만다 에가와 캐리 그랜트(그랜트의 마지막 장편 영화 출연)와 함께 한 코미디 영화 ''걸어서, 뛰지마''(1966)에서 두 번째 남성 주연을 맡았다. 찰스 월터스 감독은 허튼이 그랜트가 직접 고른 배우라고 말했다. "캐리는 허튼과 동질감을 느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23] 이 영화의 성공으로 허튼은 컬럼비아의 코미디 영화 ''누가 민트를 관리해?''(1967)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널리 상영되지는 않았다. 그는 ''결혼한 남자를 위한 안내서''의 주연으로 발표되었지만,[24] 시나리오가 변경되면서 결국 출연을 고사했다.[25]

1966년 11월, 허튼은 20세기 폭스와 독점 계약이 아닌 2년 계약을 맺었다.[26] 그러나 그는 어떤 폭스 영화에도 출연하지 않았다. 1967년 7월, 허튼은 존 웨인 주연의 전쟁 드라마 ''그린 베레''에 출연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허튼은 이 영화에서 코미디와 드라마가 혼합된 연기를 펼치며 기억에 남는 부비 트랩 사망 장면을 연기하는 특수 부대 하사 역을 맡았다.[27]

1968년, 허튼은 웨인과 함께 ''헬파이터''에 출연하여 그렉 파커 역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유정 화재 진압 대원 레드 에어의 경력을 바탕으로 느슨하게 각색되었다.[28] 1970년대 초, 허튼은 텔레비전에서 거의 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정신과 의사'', ''러브 아메리칸 스타일''(여러 번), 그리고 ''게임의 이름''과 같은 쇼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는 두 편의 TV 영화, 스릴러 ''치명적인 사냥''(1971)과 전쟁 영화 ''내키지 않는 656 언덕의 영웅들''(1971)에 출연했다.[29]

허튼은 얼 스탠리 가드너의 소도시 지방 검사 영웅인 더그 셀비 역을 TV 영화 ''그들은 살인이라고 부른다''(1971)에서 연기했는데, 이 영화는 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무산되었다. 그는 또한 코니 스티븐스와 함께 ''그녀를 엄마라고 불러줘''(1972)에 출연했는데, 이 또한 시리즈 파일럿으로 제작되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30] 그는 세 편의 실패한 시트콤 파일럿, ''수요일 밤 외출'', ''콜 홈'', 그리고 ''뉴먼 대위, M.D.''(후자는 리처드 크레나가 쓴 작품)에 출연했다.[31][32]

그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마세요''(1973)와 ''언더그라운드 맨''(1974)에 출연했으며, ''마커스 웰비, M.D.'', ''미스터리의 넓은 세계'', 그리고 ''아이언사이드''의 에피소드에도 출연했다.[33]

그의 마지막 극장 영화는 레이 댄턴이 감독한 ''사이킥 킬러''(1975)였다. 그는 이 즈음에 "내 경력의 몰락은 대부분 내 잘못이었다"라고 말했다.[34]

3. 4. 《엘러리 퀸》 (1975-1976)

허튼은 1975년 TV 영화와 1975~1976년 TV 시리즈 《엘러리 퀸》에서 허구의 아마추어 탐정 엘러리 퀸 역을 맡아 출연했다. 1946~1947년 뉴욕 시를 배경으로 한 이 시리즈에서 허튼의 상대 배우는 과부인 그의 아버지이자 뉴욕 시 경찰의 살인 사건 수사관 역을 맡은 데이비드 웨인이었다. 살인 미스터리 작가인 엘러리는 아마추어로서 그의 아버지를 돕고 매주 "실제" 살인 사건을 해결했다. 각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해결책을 밝히기 전에, 그는 관객들에게 단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제공하고 그들이 미스터리를 풀었는지 질문함으로써 "제4의 벽"을 깼다. 그는 "오랜만에 사람들에게 내가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습니다."라고 말했다.[34] 이 시리즈는 총 23개의 에피소드로 방영되었다.

3. 5. 후기 활동 (1977-1979)

허튼의 마지막 출연작으로는 《플라잉 하이》, 《$weepstake$》, 《원더풀 월드 오브 디즈니》 ("스카이 트랩") 등이 있다.[36]

그의 마지막 텔레비전 역할은 NBC에서 1979년 8월에 방영된 미판매 파일럿 《버터플라이》였다. 이는 BBC2 시트콤 《나비》를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허튼이 사망한 지 약 두 달 후에 방영되었다.

4. 개인사

짐 허튼은 1958년 12월에 교사인 메릴린 아담스(결혼 전 성은 풀)와 결혼했으나, 1963년 2월에 이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하이디(1959년생)와 아들 티모시(1960년생)가 있었다. 티모시는 배우가 되었고, 아버지와 함께 여름 극장에서 상연된 ''하비''에 출연했다.[37] 짐 허튼은 1970년 3월부터 1973년 12월까지 린니 M. 솔로몬과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이들 사이에는 딸 펀치 허튼(전 ''베니티 페어'' 부 편집장)이 있었다.[38] 그는 1964년부터 15년간 배우이자 모델인 이베트 비커스와 간헐적으로 연인 관계를 맺었다.[39]

5. 사망

1979년 6월 2일, 허튼은 45세 생일 이틀 후이자 간암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간암으로 사망했다.[40] 그는 화장되었고, 유해는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파크의 ''가든 오브 로즈'' 구역에 안치되었다.[41]

6. 출연 작품

짐 허튼은 다음 작품들에 출연했다.

연도제목비고
1975사이코 킬러영화
1973돈 비 어프레이드 오브 더 다크영화
1968그린 베레영화
1966뛰지말고 걸어라영화
1965네버 투 레잇영화
1965위스키 전쟁영화
1965던디 소령영화
1964루킹 포 러브영화
1963뉴욕의 일요일영화
1962적응 기간영화
1961천국의 독신남영화
1960해변에서 생긴 일영화



영화 및 TV 드라마 출연작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하면 된다.

6. 1. 영화

연도제목배역비고
1958사랑할 때와 죽을 때히르쉴랜드
1959지옥까지 10초크레딧 없음
1960지하인간들아담 무라드
1960해변에서 생긴 일TV 톰슨
1961허니문 머신제이슨 엘드리지
1961낙원의 연인래리 델라반
1962수평 중위머를 와이 중위
1962적응의 시기조지 하버스틱
1963뉴욕의 일요일크레딧 없음
1964사랑을 찾아서폴 데이비스
1965던디 소령그레이엄 중위
1965위스키 전쟁폴 슬레이터 대위
1965너무 늦진 않아찰리 클린턴
1966천사의 분노페트리 씨크레딧 없음
1966뛰지말고 걸어라스티브 데이비스
1967누가 민트를 훔쳤는가?해리 루카스
1968그린 베레피터슨 상사
1968헬파이터그렉 파커
1971죽음의 사냥TV 영화
1971망설이는 영웅들TV 영화
1971그들은 살인을 부른다더그 셀비 검사TV 영화
1972엄마라고 불러줘TV 영화
1973돈 비 어프레이드 오브 더 다크알렉스 파넘TV 영화
1974언더그라운드 맨TV 영화
197443 힐크레스트의 악몽TV 영화
1975사이코 킬러아놀드 제임스 마스터스


6. 2. TV 드라마

정신과 의사(1971), 게임의 이름(1971), 아이언사이드(1974) 등의 쇼에 게스트로 출연했다.[29][33] 1975년부터 1976년까지는 텔레비전 시리즈 엘러리 퀸에 출연했다.[34]

그는 또한 여러 편의 러브 아메리칸 스타일 에피소드와, 원 데이 앳 어 타임(1977), 플라잉 하이(1978), 스위프스테이크스(1979), 원더풀 월드 오브 디즈니 ("스카이 트랩")(1979) 등에 출연했다.[36]

BBC2 시트콤 나비를 기반으로 한 미판매 파일럿 《버터플라이》는 그의 마지막 텔레비전 역할이었다.(1979)[36]

참조

[1] 서적 Bygone Binghamton https://books.google[...] AuthorHouse 2015-04-10
[2] 뉴스 THE LUCKIEST GI. 1962-01-21
[3] 웹사이트 What Happened To Jim Hutton https://www.deseret.[...] Deseret News 2017-01-29
[4] 뉴스 Luck found 'em prepared 1960-12-16
[5] 뉴스 Jim Hutton Started as a Starving Actor 1962-01-21
[6] 뉴스 Looking at hollywood. 1962-06-28
[7] 뉴스 Young jim hutton owner of long term film contract. 1961-11-12
[8] 뉴스 MOVIE PRODUCER CITES STAR POWER 1960-10-19
[9] 뉴스 Jim and Paula: Shades of Powell, Loy? 1961-07-16
[10] 뉴스 Looking at hollywood. 196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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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뉴스 SHELLEY BERMAN SIGNS NEW PACT. 1965-01-19
[22] 뉴스 Two signed for 'paris'. 1965-09-21
[23] 뉴스 "'Walk, don't run' sets fast pace" 1966-01-11
[24] 뉴스 "'Married' chooses hutton." 1966-08-08
[25] 뉴스 MOVIE CALL SHEET 196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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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뉴스 TV MOVIE REVIEW. 1974-05-08
[34] 뉴스 Jim hutton 197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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